당왕조(618∼907)는 건국 후 톈산산맥 서부 북쪽 기슭을 근거지로 한
서돌궐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섰다.
이 무렵 로프노르 일대의 건조화가 진행되어 서역남도의 이용도가 줄어들었고,
서역북도는 둔황(돈황)에서 북상하여 이오(하미)로 나와 고창에서 소륵으로 향하는
코스(톈산남로)와 톈산산맥 북쪽 기슭에서 나아가는 코스(톈산북로)가 이용되었다.
당나라의 정복활동은 북도를 따라 이루어졌다.
7세기 중엽 타림분지 전역을 제압한 당나라는
구자(쿠차)에 설치한 안서도호부를 중심으로 경영에 힘썼기 때문에 동서무역도 번창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상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탈라스강 전투(751)에서의 패전과 안사의 난(755∼763)으로 당의 세력이 쇠퇴해 가자
9세기 중엽 북아시아에서 이주하여 타림분지의 투르크화를 추진한 위구르인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상인이 차츰 그들을 대신하여 갔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자원부국(資源富國)이다. 페르시아어로 땅을 뜻하는 ‘스탄(Stan)’이 붙은 나라들을 대표한다.
▶이 나라의 ‘탈라스’라는 도시에서 남서쪽으로 190㎞ 떨어진 곳에 탈라스 강이 흐른다. 주변에선 잎담배 재배와 양·산양 방목이 이뤄진다. 이곳에서 8세기 중반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탈라스 전투’가 펼쳐졌다.
▶아랍 군대와 당나라 군대가 회전(會戰)했다. 당시 탈라스 강변에서 당나라 군대 3만여명과 이슬람 압바스 왕조와 티베트 연합군 8만여명이 맞붙었다. 당나라 군대는 병력 열세에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일방적인 패배였다.
▶닷새 동안 이어진 전투의 초반 양상은 대등했지만 당나라 군대가 무너졌다. 동맹군으로 참전했던 카를루크가 압바스 측에 붙으면서 당나라 군대는 전멸했다. 장수와 병사 수천명만 가까스로 도망쳤다. 751년 오늘의 일이다.
▶이 전투에 대한 중국의 기록은 짧다. 동원된 병력이 많지 않은 데다 진 싸움이어서 그렇겠다. 승자인 이슬람의 기록도 많진 않다. 승장인 아부 무슬림이 견제받다 암살당한 뒤 기록도 함께 지워진 탓이다. 양쪽에서 기억하기 싫거나, 지우고 싶었을 터이다.
● 힌두쿠시를 넘어서 만들어낸 신화
고선지가 연운보에서 곧장 소발률국의 수도를 향해 진격할 것을 공언했을 때,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특히 조정에서 현종이 파견한 술사 한리빙과 환관 변령성도 두려워서 가려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고구려 출신 장수인 고선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 보낸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00일 동안의 고단한 행군과 연운보에서 치른 살벌한 전투에도 이미 기가 질려있었는데, 지금까지 행군해 온 길보다 더 험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서 적국 깊숙이 들어간다는 계획에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출처 : 뉴스톱(https://www.newstof.com)
[고선지 이야기] ② 고선지의 '과욕‘이 부른 참사, '탈라스 전투'의 대패 < 생활/문화 < 기사본문 - 뉴스톱 (newsto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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