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2] 1812년 7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17년 3월 문묘에 입학례를 올린 뒤 성균관에 입학했고 1819년 3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관례를 치루고 그해 음력 10월 풍양 조씨(후일의 조대비)와 가례를 올렸다.
1827년(순조 27) 2월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이에 처가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2] 특히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계열 인사까지 등용했다. 1828년에는 창덕궁 안에 사대부의 집을 본따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다. 사대부들의 학구열을 궁 안에 도입하는 한 편, 부왕인 순조가 존호를 받는 행사를 치를 목적이었다.
1829년에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양수와 소식의 글을 가려 뽑아 사문조영(文史咀英)의 편찬, 간행을 명하고 정리자(整理字) 활자로 간행하다.
노론내의 다른 정차들과
일부 소론까지 중용하여 일각에서는
그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쇄신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한다. 불과 향년 22세였다.
그는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됐으며, 헌종마저 자식없이 죽자 익종과 6촌이되는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철종도 후사없이 죽자 헌종과 족보상 6촌형제이자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명복이 입승대통해[3] 고종으로 즉위한다.[1]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에는 양아들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됐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 내 수릉(綏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