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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농민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로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서울로 와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면서 서구 문물을 접했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 관서 지부에서 일하면서,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고 해체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점진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점진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학교이다. 그러나 부족함을 느낀 그는 형 치호(致浩)와 친지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최초의 한인 친목회를 조직해 한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의 일을 시작했다.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에게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일함으로써 한인들의 신용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교포 사회의 영사관 구실을 했다.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야학을 개설해 교포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순 한글신문인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이 공립협회는 1909년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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