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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작년 12월 15일에 개막돼 2월 28일까지 열리고 있는 전시회의 이름입니다.
흥남 철수는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더 잘 알려졌다.
“6·25전쟁 때 10만 명의 피난민을 흥남에서 철수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적어도 백여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은 나의 생애를 걸고 노력하여 이뤄야 할 일이다” - 현봉학
의사인 현봉학(1922~2007)은 흥남철수 당시 미 제 10군단의 고문관으로 철수 작전을 지휘하던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사령관에게 민간인 철수를 건의해 실행케 한 사람입니다.
공산 치하에 살던 민간인들을 구출해 낸 미군의 영웅적인 작전으로 알려진 흥남철수작전입니다.
더욱이 그가 생애를 걸고 이루고자 했던 상봉이 분단 70년이 넘도록 일천만 이산가족 중 2,000명도 안 되고 있는 현실에 생전의 그가 얼마나 가슴아파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됐던
미군 10만여 명과 10만 명 가까운
피난민의 흥남부두 철수를 주제로 한 전시회
그때 흥남부두에 모여든 10만 명의 피난민 중 상당수는 미군 철수가 끝나면 함흥일대에 대규모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에 겁먹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죽더라도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부모를 뒤로 하고 피난 온 자식들의 회한은 그래서 더욱 사무쳤습니다.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 ---
철수 작전에 동원된 200여 척의 선박 중에서
23일 마지막 출항한 배
군인과 군수물자를 후송하기 위해 미군이 빌린 상선이었는데, 물자 대신 정원의 10배가 넘는 피난민 1만4,000여명을 태웠습니다. 이 배의 라루 선장은 “그날 바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키를 잡은 것은 하느님이었다.”고 뒷날 회고했습니다.
이 배에는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같이 실려 있었습니다. 26일 거제에 도착하기까지 나흘 간의 항해 중 숨을 거둔 주검들은 칠흑의 바다 속으로 던져졌으나, 5명의 새 생명도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대신 김치 1,2,3,4,5로 명명되었습니다.
그 중 생존이 확인된 유일한 사람이 크리스마스 날 태어난 이경필(66) 씨입니다. 그의 부모는 피난민 수용소가 있던 거제에서 ‘평화사진관’ ‘평화상회’를 경영했습니다. 삶은 남루했으나 그들에게 평화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씨는 수의사가 되어 지금도 거제에서 평화가축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함경도 또순이 기질은 철수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피난 올 때 머리만 꺼내 싸들고 온 고모의 재봉틀은 훗날 국제시장에서 옷가게의 밑천이 됐을 것입니다.
건어물이나 엿을 챙겨온 사람 가운데는 배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어사전과 학교졸업장, 학교성적표 등을 챙겨온 사람들에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 달만 외로이 떴다’는 가사--- 부산의 영도다리는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수소문하는 피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장소
영도다리 밑에 점집 거리가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합니다. 금순이의 오빠는 영도다리에서 온종일 금순이를 찾아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난간에 기대어 문득 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걸려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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