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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굳세어라 금순아

by 산골지기 201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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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사 작곡 / 박 시춘  

                                  현인 원곡/ 하늘재 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 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 달만 외로이떴다.

 

 철의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현인

1951년 1.4 후퇴 직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와 함께 전쟁으로 헤어진 血肉 금순이가 굳세게 잘 살아주길 바라는 심정이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의 "굳세어라 금순아" 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수이자, 부산이 낳은 "제1세대 가수"인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현란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유명한 현인은 불어, 중국어, 영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로, "굳세어라 금순아" 외에도 "비 내리는 고모령","고향만리",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베사메 무쵸" 등 1천여곡의 노래를 남긴 "국민 가수" 이다.

 

부산 영도에서 출생 현인은, 아버지 현 명근과 어머니 오 봉식의 2남 1녀 중 맏이로 1919년 12월 14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풍족했다.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초량의 영주 소학교로 옮겼으며,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 1931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영어와 일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학교 배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밴드부 활동을 통해 일본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고 한다.

 

현인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일본 여인과 재혼하자,

이에 상심해, 아버지가 권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현인은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을 포기하고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 - 현 도쿄예대) 성악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는 현재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노래비는 가로 세로 각각 4m, 높이 3m로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형상과 음반 파도 음표와 함께 갈매기가 나는 모습으로, 노래비 앞에는 현인이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의 1.2m 동상이 세워져,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구 파크호텔 입구에 "비 내리는 고모령", 경주 불국사 앞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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