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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서양함대의 침입

by 산골지기 2015.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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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프랑스의 게랭 제독이 비르지니(Virginie) 호를 이끌고 2개월간 조선 근해를 탐사한 이후 프랑스 식민성에 한반도를 무력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을 것을 건의한 적도 있었지만 곧바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 후 조선에서 병인박해가 일어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청 주재 프랑스 공사는 청과 조선의 조공 관계를 언급하며 청에게 거중 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청은조선이 비록 조공국이지만 정교 금령(政敎禁令)의 모든 일은 조선이 전적으로 자주 자행(自主自行)하므로 이에 관여할 수 없다.”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프랑스 공사는 조선에 보복 원정을 하여 국가의 위신을 높이고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로즈의 극동 함대를 파견하였다.

로즈 제독은 리델 신부를 향도(嚮導)로 삼아 두 차례의 조선 원정을 실시하였다.

 

1차 원정 당시 프랑스군은 강화 해협에서 서울의 서강(西江)까지 탐사하여 해도를 작성하였다(1866. 9.).

 

그 후 7척의 군함과 1,000여 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침략하고 강화성을 점령하였다(2차 원정, 1866. 10.).

 

조선이 프랑스군의 불법 침입을 규탄하며 퇴거할 것을 통고하자 로즈 제독은 선교사 처형에 대한 사죄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문수산성과 삼랑성(정족산성)에서 각각 한성근 부대와 양헌수 부대에게 패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에 로즈 제독은 충분히 보복 원정을 했다고 생각하며 철수하였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 집결하여 약 보름 동안 실전에 못지않은 해상 기동 훈련을 실시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마침내 주청 전권 공사 로우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를 포함하여 85문의 대포가 탑재된 군함 5,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발하였다(음력 1871. 3.).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강화 해협 쪽으로 북상, 물류도(勿溜島)를 모함의 정박지로 정한 다음 조선에 해안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포함 2척과 기정 4척으로 구성된 미군의 탐측대는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를 측량, 정찰하기 위해 해협을 거슬러 올라갔다. 탐측대가 손돌목 포대 부근에 도달했을 때 포탄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미군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했지만 조선 측 대포의 성능이 형편없었으므로 피해가 없었다(4. 14.).

손돌목 포격 사건을 계기로 미군은 대대적인 강화도 침공 작전을 펼쳤다(4. 24.).

 

미군은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초지진에 함포 사격을 가하여 초토화시킨 후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다음날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수륙 양면 작전을 전개하면서 덕진진을 점거하고 광성보에 이르렀다.

 

난공불락의 자연 요새로 알려진 광성보에서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지휘 아래 최정예 부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미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사자 350, 부상자 20명이었던 데 비해 미군은 전사자 3, 중상자 5, 경상자 5명에 불과하였다.

 

로저스 제독은 전승 축하 훈령을 발표하며 조선과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미국 측이 전승 축하 훈령을 발표한 바로 그 날,

 

대원군은 패전을 인정하기는커녕 서양 오랑캐와

 

결코 통교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조선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미군은 강화 해협을 통과할 수 있

는 포함이 2척에 불과하고, 서울 진격을 위한 정부의 훈령을 다시 받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정이 겹치자 결국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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