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방어전투는 국가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국면에서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공세 이전의 기틀을 마련한 작전이었다.
국군은 북한군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여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부산 점령을 목표로 한 그들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퇴하게 되었다.
즉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마산·대구·경주 축선을 고수하여 국토의 약 10%에 불과한 부산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한 선에서 북한군의 전쟁목표를 분쇄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총력전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정부와 국민들은 낙동강 방어선낙동강 방어선에서 강한 국가수호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어려운 시기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을 활용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공세이전의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방어에서 공격으로, 수세에서 공세로,
후퇴에서 반격으로의 대전환을 이루게 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연합군이 독일군에 밀려 덩케르크까지 밀려 바다로 철수하였듯이 낙동강선이 돌파되면 제2의 덩케르크가 될 뻔 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더구나 낙동강 방어선을 지탱하지 못하면 한국 정부는 제주도로 이전하여 제2의 대만이 되거나 아니면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될 상황이었다.
결국 낙동강 방어전투는 가장 위기의 순간에 유엔의 집단안보체제에 따라 편성된 유엔군이 한국군과 함께 방어함으로써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고, 나아가 방어에서 공격으로, 수세에서 공세로, 후퇴에서 반격으로의 대전환을 이루게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일대 반격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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