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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유학산 전투

by 산골지기 201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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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遊鶴山)은 '학이 노니는 산'이란 뜻이다.

 

 

 주변에 학(鶴) 자가 들어있는

 지명(학하리, 학산리 등 마을과 연못인 학산지)이

많으며 유학산, 소학산, 황학산이 3학(鶴)산을 이루고 있다

다부동(多富洞)이란 이름은 부자들이 많은

 동네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7월 29일부터 9월 24일까지 2개월여간 전투 동안 아군, 적군 포함해 2만7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 바로 유학산이다.

 

 

6.25 전쟁이 일어난 이후 1950년 8월 13~ 23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 학산리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6.25 전쟁에서 유학산이 중요한 위치였다. 그 이유는 유학산이 점령을 당하게 된다면 다부동 이라는 지역이 점령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적들이 사용을 하는 무기중 사전거리가 10km 인 포를 다부동에서 대구까지 쏠 수 있는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부동 지역을 지키기 위해 유학산은 중요한 위치였다.

그리고 유엔군이 상륙하고 전쟁에 사용될 물자가 들어왔던 곳은 부산항이었다. 지원군과 물자가 들어오기에 안전한 곳이 부산이었다면 부산을 방어할 교두부의 위차로서도 다부동은 적절 했고 그 다부동을 지키기에는 유학산이 중요했다.

매일 주인이 달라지는 치열한 전쟁인

유학산 전투 중에 837고지 전투와 674고지 전투가 치열했다.

674 고지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8월 15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리에 있는 유학산의 동편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674 고지 전투는 제 12연대 제 1대대와 북한군의 전쟁이다.

 

14일 새벽 국군 1․3 중대가 674 고지 8부 능선까지 진출 했지만 674 고지를 방어하는 북한군으로 인해 4~5능선 후퇴하고, 209고지에 관측소를 설치 후 주간 전쟁을 통해 674고지를 탈환했지만 미 공군의 포격 때문에 고지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다시 정비 후 공격을 개시 하였지만 북한군의 수가 늘어 탈환하지를 못했다. 15일 오후 학도병과 신병이 다부동에 배치되고 3대대가 1대대 대신해 674고지를 담당하게 됐다.

 

1대대는 837고지 전투를 하게도고 3대대는 10차례의 주고받는 공격 끝에 22일 새벽 특공대 투입 공격의 성공으로 기나긴 674 고지를 탈환하고 이 고지에서의 전투도 끝이 나게 된다(?).

837 고지 전투는 1950년 8월 16일부터 8월 23일까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산리의 유학산 동편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그837 고지 전투역시 674 고지 전투에 참여한 국군 제12 연대 제1대대와 먼저 자리를 잡은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837고지를 북한군이 먼저 점령을 하여 그 고지를 탈환을 하기위해 7번의 공격을 주간에 했지만 가파른 지형과 북한군의 수류탄 공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와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8번째 공격에서는 제 1대대는 주간 공격을 회피하고 야간공격을 처음으로 시도를 하여 공격을 했고 이 공격은 적군의 경계가 소홀히 해진 틈에 공격을 하게 되어 성공적인 공격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8번째 공격에서 837 고지를 탈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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