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 상실과 3·1 운동을 전후하여 근대 문학이 정립되었다.이행기를 거쳐 1910년대에는 근대 문학이 전개되기 시작되었다. 김억은 서구의 상징주의 시를 번역하면서 서구의 근대 문학을 소개하였으며, 주요한은 개인의 서정적 감정을 노래한 ‘불놀이’등을 발표하면서 현대적 자유시의 선구자가 되었다. 소설에서는 이광수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광수의 ‘무정’은 계몽사상을 담아내면서도 인물의 성격이 분명하고 구성과 문체 또한 이전 작품들과는 구별되어, 본격적인 근대 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3·1 운동의 발발과 실패는 근대 문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보다 활발한 문화, 예술, 교육 운동이 일어나고, 문학에서는 수많은 잡지와 동인지를 중심으로 근대 문학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의 시는 3·1 운동의 좌절로 인한 패배 의식과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나타났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을 통해 우리 고유의 가락에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담아서 노래하였고,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광복의 염원을 노래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통해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조국 광복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프롤레타리아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의 생활을 제재로 하여 그들의 사회ㆍ정치적 이념을 표현하는 문학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1925년에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가 결성되면서 그 형태가 나타났다.
이 시기의 소설은 1910년대 문학의 계몽적 성격에서 벗어나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김동인은 동인지 “창조(創造)”에 ‘배따라기’를 발표하며 순수 문학적 입장에서 근대적 소설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폐허(廢墟)”의 동인이었던 염상섭은 ‘만세전(萬歲前)’을 통해 사실주의적 입장에서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그 속에서 겪는 지식인의 고뇌를 실감 나게 그렸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최서해의 ‘탈출기(脫出記)’ 등도 일제 강점하의 하층민의 빈궁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극 문학에서는 김우진을 중심으로 한 ‘극예술 협회’가 근대극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박승희를 중심으로 한 ‘토월회’가 대중적인 희곡 작품들을 선보였다.
한편,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하면서 프로 문학으로 불리는 계급 문학이 등장하였다. 프로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임화, 소설가로는 한설야, 이기영, 김남천 등을 꼽을 수 있다.
“1930년대는 다양한 경향의 문학이 발달한 시기이다.”이 시기에는 일제의 사상 탄압이 극심해져 민족 문학과 계급 문학이 위축되고 대신 순수 문학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였다.
특히 시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해서 여러 유파가 등장하였다.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 등이 주도한 시문학파는 세련된 언어 감각과 음악성 등 예술적 기교를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등의 시인들은 도시적 감각과 시의 회화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발표했다. 서정주와 유치환 등의 생명파는 생명의 강렬한 충동과 삶의 의미, 고뇌 등의 주제를 추구했다. 한편 이용악과 백석은 우리 시의 완성도를 높이면서도 민족의 현실에 관심을 둔 시들을 창작하였다.
소설에서는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탁류’처럼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장편 소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으며,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과 같은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고민을 밀도 있게 드러낸 작품이 등장하였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이 결성한 ‘구인회’는
30년대 서울의 세태를 근대적인 문체로 그렸다.
그중 이상은 시, 소설,수필에 걸쳐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쳐 문학사에서 특이한 존재로 남아 있다.
1930년대 후반에는 김유정과 김동리 등이 한국적 정서의 본질과 토속적 세계를 탐구하였다. 유치진은 ‘토막’, ‘소’ 등의 희곡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파괴되어 가는 농촌의 모습을 담아내었으며, 김진섭과 이양하와 같은 전문적인 수필가가 등장하였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며, 우리 문학은 암흑기를 겪었다.”
창씨개명, 민족어 말살 정책이 시행되고 언론사를 강제로 문 닫게 하는 등 1940년대에 들어 일제의 수탈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일부 문인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일본의 제국주의를 칭송하는 작품을 썼다.
하지만 일부 문인들은 아예 절필을 선언하기도 하였으며, 민족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해외에서 혹은 비공식적으로 끊임없이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대표 시인으로는 유교적 지사 의식을 바탕으로 저항 정신을 표출한 이육사와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성찰적 태도를 보인 윤동주가 있다. 소설가로는 끝까지 한글로 작품을 창작한 이태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