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세계적인 무역대국이다. 수출입량으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바쁜 컨테이너 항구 중 하나이고, 승객수와 국제 화물 처리량으로 세계에서 번화한 공항 중 하나이다. 대외 은행 교역량으로 홍콩은 세계 15대 은행센터이다.
외국 기업과 중국 기업들이 잇달아 홍콩 주식 시장에 상장하여 홍콩 주식 시장 총액은 2006년 뉴욕을 제치고 세계에서 런던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시장이 되었다. 국제통화기금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홍콩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1인당 GDP)은 31,799달러이고, 1인당 실질 구매력(1인당 PPP)은 45,277달러이다. 홍콩의 1인당 PPP는 아시아에서 싱가포르 다음이다. 2010년 각 산업을 종합해 보면 국내생산총액에서 서비스업 비중이 92.3%로 가장 높고, 산업 비중은 7.6%, 농업 비중은 0.1%이다.
홍콩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및 자유 방임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경제학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은 홍콩을 자유 방임 경제의 사범이라고 보고 있다. 2006년 9월 11일 선포한 “소 정부 대 기업 정책”(영어: positive non-interventionism, 積極不干預)을 다시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로, 정부의 경제 정책 이념은 여전히 시장 역량에 의해서 경제를 주도하게 하고 있었고, 시장 발전을 조작하고 이끄는 것은 피하고 있다.
상업 규정 관리는 간소화하고, 정부는 청렴결백하고 고효율, 저(低)세율, 세제(稅制)의 간소화, 법제 건전화, 재산권 관념의 견고화, 등의 요소들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게 홍콩은 시장 경제 운영의 선두 주자로 믿게 하고 있다.
미국 전통 기금회는 1995년에, 캐나다 프레이저 학회는 1996년에 발표한 자유경제체제보고서에서 줄곧 홍콩을 세계 1위로 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우수한 지정학적 위치, 정보 유통, 고효율의 조립 가공, 서비스까지 홍콩의 경제에 공헌한다.
홍콩은 비좁은 땅으로 천연자원이 부족해, 무역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 받은 뒤 1841년 6월 7일에 자유항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상선 자유 진출을 허가했다. 홍콩은 편리한 지리 위치 및 깊은 수심과 넓은 항구의 해항을 이용해서, 중계 무역 물류의 메카로 발전하였다. 1949년 국공 내전을 피해 기술과 자금을 가진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대표적으로 홍콩 상하이 은행과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있다. 곧 이어 한반도에서 터진 한국 전쟁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대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편에 서서 참전했기 때문에 1950년대 초 유엔이 실시한 수출입 금지 조치에 직면하게 되었고, 홍콩은 중계항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엔지니어의 창의력 및 거대하고 청렴한 노동력에 의해서, 홍콩은 경공업형 경제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공단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가공 수출 제품으로는 방직물, 플라스틱 ,가발, 시계, 전자 부속 등이 있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중화인민공화국은 덩샤오핑의 지도 아래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제조업은 중국 대륙으로 이동하고, 홍콩은 다시 중계항으로서의 위치를 회복하였다. 금융업, 서비스업의 비중이 갈수록 커져 갔고, 국제 금융의 중심으로 변화에 성공했다. 홍콩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대한민국, 중화민국,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4마리의 용 중 하나로 명성과 명예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