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년(영조 51) 11월 1일에 쓴 글을 살펴보자,
<홍인한이 평안 감영에서 돌아온 뒤, 다시 정승을 하려는 마음을 내어 정후겸에게 밤낮으로 아첨하였다. 그때 상(영조)은 천식이 날로 심해져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저들의 간악함으로도 틈을 탈 길이 없었다. 또 내가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므로 틈을 탈 방법이 없었다.
갑오년(1774년 12월 7일), 피곤한 까닭에 거처하는 건물로 돌아온 나는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중관이 추가로 정한 후보자의 명단을 보여주었다. 급히 일어나 보니, 홍인한은 이미 우의정에 제수되어 있었다.
마음으로 매우 놀라 화완옹주를 만나러 가서 '어째서 이 사람을 우의정에 제수했습니까? 최근 상의 환후를 보면 하찮은 벼슬을 제수하는 것도 분발하여 처리할 가망이 없습니다. 정승을 제수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속히 이루어졌습니까?' 하였다.
화완 옹주는 정색을 하고 '나는 모릅니다'라 하기에,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왔다.
이튿날 정후겸이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우상은 바로 동궁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렇게 특별히 제수된 것은 공사 간에 매우 다행스럽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마지못해 '정승으르 잘 골랐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글들은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영조 말기의 대리청정을 둘러싼 정국에 관해 쓴 일기로 나중에 ‘일성록’의 시초가 됐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이라고 하겠다.
앞글에서 언급된 홍인한과 정후겸 일파가 세손의 신상까지 위협했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