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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

동경민란 상황

by 산골지기 2016.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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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1월 제1차 반란이 일어났다.

 안찰부사(使) 주유저()는 반란군을 진압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반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조정에서는 남로착적사(使)를 파견하였다.

1193년에 운문에서 김사미가, 초전(울산)에서는 효심() 등이 제2차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대장군 전존걸과 이지순 ·이공순 ·김척후로 하여금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지순이 반군과 내통하여 관군이 자주 패하였으며, 전존걸은 집권자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을 분하게 여겨 자살하였다.

 

조정에서는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使), 대장군 고용지()를 도지병마사(使)로 삼아 난을 평정하고 김사미 ·효심 등을 처형하였다.

 

동경민란 중에서는 이비를 두목으로 한 일당과 패좌를 두목으로 한 일당 등이 가장 완강하였다.

 

이들은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삼아 민심을 선동하였고, 집권자 최충헌
은 연이은 반란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벌군을 동원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1204년 조정에서는 동경을 경주로, 유수를 지사()로 격하하였다.

또  반군 토벌에 공을 세운 안동도호부()를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경상도의 이름을  상진안동도()로 바꾸었다.

▶ 김사미의  신상

김사미의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사미()라는 말이 하나의 단서가 된다. 사미는 출가하여 십계()를 받기는 했으나 아직 비구가 지켜야 할 구족계를 받지는 않은 남성 불교 수행자를 뜻한다.

김사미가 운문사에서 사미로 지낸 적이 있거나, 운문사 소유 땅을 소작하는 농민이자 일종의 재가 수행자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밖에 김사미가 경주의 유력 가문 출신이지만 몰락하여 운문으로 피신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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