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흥백은 노비였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최재형은 1866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 지신허로 갔다. 어렸을 때 러시아에서 배고픔때문에 가출하였다.
은인을 만나다
최재형은 항구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선장 부부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의 부인은 학식이 뛰어났다.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선장은 최재형이 해외에서 견문을 넒힐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이를 통해 최재형은 풍부한 학식과 폭 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군수업으로 부를 쌓다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1년 수입이 10~12만 불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특별히 조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조선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할 지위가 높아졌다.
항일 투쟁의 지원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柳麟錫)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옛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또한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였는데, 동의회는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하는 군사적 활약을 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가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4명에 불과할 만큼 가벼운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의병들이 러시아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 징집, 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활동을 방해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지원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 최재형에게 안중근의사가 찾아온다.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의사가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더욱 러시아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1],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 일본의 음모로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최후
여건이 여의치 않아진 최재형은 한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20년 러시아 내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최재형의 나이 63세였다. 현재 그의 손자 최발렌틴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최재형의 사진과 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였하다.
우스리스크에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유럽풍의 벽돌집이 있다. 지금은 러시아인이 살고 있다.
평가
군수업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