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양사/중국사

의화단 운동

by 산골지기 2016. 10. 30.
728x90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의화단의 난이라고도 하며 1900년,

즉 경자년(庚子年)에 일어난 교난이라는

 의미로 경자교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의화단을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라는 의미의 ‘권비(拳匪)’나 ‘단비(團匪)’로 지칭하였는데, 따라서 의화단운동을 ‘의화단의 난,’ ‘권비의 난,’ ‘단비의 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산둥 지역에서는 일찍이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됐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했다.[1][2]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 성의 북부 지역에서 1898년 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해 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했다.[1][3]

 1899년 12월에 새로 부임한 산둥 순무(巡撫) 위안스카이는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했는데 이것이 의화단 세력이 허베이 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면서 의화단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의화단은 철도, 교회, 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기도 했다.[1]

 


1900년 1월 서태후가 황제인 광서제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열강이 서태후의 의도를 간파하고 공동으로 압력을 가해 그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 때문에 청나라 정부의 수구파는 의화단의 배외 운동을 고무해서 열강에 압력을 가하고자 했다.

1900년 6월에 의화단이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 포고했다. 이에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8개국이 파병해서 베이징을 비롯해 양쯔 강 이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1]

 

열강은 중국을 분할하지 않는 대신 보존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청나라 왕조와의 협상을 거쳐 1901년 9월 7일에 강화 조약인 신축 조약(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했다.[4]

그 내용은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열강의 중국 내 군대 주둔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동양사 > 중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교  (0) 2016.12.03
둥베이 지방  (0) 2016.11.23
원나라  (0) 2016.10.28
봉건제  (0) 2016.10.04
국공 내전  (0) 2016.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