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역사/고대

고구려의 성장

by 산골지기 2016. 9. 5.
728x90
반응형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 연대(신라 : 서기전 57, 고구려 : 서기전 37, 백제 : 서기전 18)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사회에는 철기문화가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강되었고, 새로운 전술인 기병전(騎兵戰)의 등장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안으로는 인접한 정치세력 간의 통합이 촉진되고, 밖으로는 요동군·현도군·낙랑군·대방군 등 중국의 식민지 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왕권이 성립되고 그 지배력도 강화되어 갔다.

고구려가 성장한 동가강(佟佳江) 유역과 압록강 중류 지역인 통구(通溝) 일대는 가장 먼저 정치세력이 성장하여, 이미 위만조선 때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세력이 성립되었던 지역이다. 또, 서기전 82년에는 이 지방의 지배세력이 현도군을 몰아내어, 한(漢)나라는 서기전 75년 현도군을 요동지방의 흥경(興京)노성(老城) 방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 요충 지대에서 성장한 고구려는 태조왕(53∼145) 때 동해안 지역에 진출하고 청천강 상류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계속해서 요동지방을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이같은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5부에 대한 국왕의 지배권을 상당 부분 확립하고 책구루(幘溝漊)를 설치하여 한의 정치 경제적 간섭을 차단함으로써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통구를 잃은 한나라는

서안평에서 압록강 하류를 건너 낙랑군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였다.

 

신대왕은 다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는 등 교통로를 위협하더니, 311년(미천왕 12) 서안평을 확보하고, 313년에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북방에서 중국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 그 세력을 구축하며 성장해 나갔다.

728x90

'우리 역사 > 고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사군  (0) 2016.09.08
귀족회의와 고구려, 백제  (0) 2016.09.05
가야--- 6개의 소국으로 형성  (0) 2016.09.02
고인돌 유적지  (0) 2016.09.01
고구려 - 남진정책  (0) 201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