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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남자현의 활약

by 산골지기 2015.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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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일제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녕성 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여사를 후원하던 일송() 김동삼() 선생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아무도 김동삼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 받고 연락책 역할을 거뜬히 해내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동지들의 행동지연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여성다움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간호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천에다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인()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하였던 것이다.

1933년 초 여사는 동지 이춘기()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제거하기로 하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게 장춘(당시 )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독립은 정신에 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으로 순국

여사는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는데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조모 씨()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여사는 유복자인 독자 영달()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였다(이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이승만 선생에게 이를 전달하였다고 함).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


    1925년 11월 23일 조선총독() 주살시도
    1932년 6월 30일 국제연맹조사단에 독립호소(하얼빈)
    1933년 8월 8월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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