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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일상

묏버들 시조

by 산골지기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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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버들갈ᄒᆡ것거보내노라님의손ᄃᆡ 시조

묏버들갈ᄒᆡ것거보내노라님의손ᄃᆡ로 시작하는 시조는

조선 선조시기 함경남도 홍원의 기생 홍랑이 조선 중기 8대 문장가로 꼽히는 고죽 최경창과 이별하며 지은 시조 입니다.

 

함경도의 기생 홍랑이

당시 연인이었던 최경창과 이별하며 지은 한글 시조는

조선시대 최고의 시조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던 홍랑

함경도의 기생인 홍랑은 홀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습니다.

홍랑은 어머니가 오랜 병석에 있어 걱정하던 중 80리 떨어진 곳에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열두 살 나이에 꼬박 사흘 밤낮을 걸어 찾아갔습니다.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나귀 등에 홍랑을 태워 왔으나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충격을 받은 홍랑이 쓰러지는 상황이 벌어졌고요 홍랑은 간호를 받은 후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머니 장례를 치렀습니다.

어머니를 여윈 홍랑은 어머니가 죽은 후 석달 동안 무덤을 지켰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석달 동안 무덤을 지켰던 홍랑은 이후 최경창과 연문을 일으키게 됩니다.

 

의원이 홍랑을 수양딸로 삼음

어머니를 잃은 홍랑을 불쌍히 여긴 의원이 홍랑을 데리고 와 수양딸처럼 키웠습니다.

홍랑을 불쌍히 여긴 의원이 데리고 와 수양딸처럼 키웠지만 홍랑이 어머니 무덤이라도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해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홍랑은 타인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후 기생이 된 홍랑은 주위로 부터의 숱한 유혹들을 뿌리치다가 최경창이 북평사(北平使)로 왔을 때 그에게서 얼굴도 모르는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품에 안겼다고 합니다.

홍란은 북평사로 온 최경창을 모시는 일에 전념했으나 이듬해 봄 고죽이 서울로 가게 됩니다.

쌍성에서 작별하고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렀을 즈음 날도 저문데 비마저 뿌렸습니다.

당시에 홍랑이 지은 시조가 다음과 같은 시조입니다.

묏버들갈ᄒᆡ것거보내노라님의손ᄃᆡ

擇折楊柳寄千里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자시ᄂᆞᆫ창밧긔심거두고보쇼서

人爲試向庭前種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예새닙곳나거든날인가도너기쇼서

須知一夜生新葉

밤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나인가 하고 여기소서

折楊柳寄與千里人

버들가지 꺾어서 천 리 먼 곳 임에게 보내니

爲我試向庭前種

나를 위해 시험 삼아 뜰 앞에 심어 두고 보세요

須知一夜新生葉

행여 하룻밤 지나 새잎 돋아나면 아세요

憔悴愁眉是妾身

초췌하고 수심 어린 눈썹은 첩의 몸인 줄을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묏버들 시조는 조선 중기 8대 문장가로 꼽히는 고죽 최경창을 사랑한 경성 기생 홍랑의 이별의 아픔이 담긴 작품이리거 힐수가 있습니다.


홍랑은 효녀였으며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오래 병석에 있어 걱정하던 중 80리 떨어진 곳에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열두 살 나이에 꼬박 사흘 밤낮을 걸어 찾아갔습니다.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나귀 등에 그를 태워 왔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홍랑이 쓰러져 의원은 그를 치료하는 일에 매달렸고,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머니 장례를 치렀는데요

이 일이 있은 후 홍랑은 석달동안 어머니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홍랑은 주위로 부터의 숱한 유혹을 물리치다가 1573년 가을 고죽 최병창이 북평사로 왔을 때 그에게서 얼굴도 모르는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품에 안겼습니다.

함경도의 기생 홍랑은 고죽을 모시는 일에 전념했으나 이듬해 봄 고죽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홍랑이 쌍성에서 작별하고 함관령 고개에 이르렀을 즈음 날도 저문데 비마저 뿌렸습니다.

함경도의 기생 홍랑은 고죽과 작별하고 1년 남짓 지나 고죽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밤낮을 걸어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 명종비 인순왕후의 승하로 국상마저 겹쳤는데여 두 사람 사이를 헐뜯은 탓에 고죽은 관직이 삭탈되고 홍랑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죽 최경창은 '말없이 마주 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라는 시로 홍랑을 보냈습니다.

*부임과 동시에 객관한 고죽

고죽 최경창은 홍랑과 두 번째 이별 후 다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고죽 최경창은 1582년 종성 부사로 함경도에 다시 파견됐습니다. 그러나 부임과 동시에 고죽은 객관에서 객사했습니다.

홍랑과 고죽간의 애끊는 사랑의 시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홍랑과 고죽간의 애끊는 사랑의 시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가 되는 가운데 400년이 넘는 지금도 해마다 봄의 버들강아지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지극한 사랑

홍랑과 최경창이 작별하고 1년 남짓 지나 고죽 최경창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홍랑이 7일 밤낮을 걸어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에 함경도·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는 '양계의 금'이 시행되고, 거기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승하로 국상마저 겹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함경도 기생과 만났다는 이유로 고죽은 관직이 삭탈되고 홍랑은 강제로 귀향해야 했습니다.

이 두번째 이별 때는 반대로 최경창이 홍랑에게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보내며 슬픔을 표현했는데요 당시에 나온 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玉頰雙啼出鳳城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한양을 떠날 때

曉鶯千爲離情

새벽 꾀꼬리 저렇게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羅衫寶馬河關外

비단옷에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

草色送獨行

풀빛 아득한 가운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

相看脈脈贈幽蘭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

此去天涯幾日還

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

 

최경창은 1582년 종성 부사로 함경도에 다시 파견됐으나 부임과 동시에 객관에서 객사하였습니다.

함경도의 기생인 홍랑은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후 최경창 무덤 아래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최경창의 집안인 해주최씨 문중은 기생인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해주최씨 문중은 기생인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

기생 홍랑의 시신을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홍랑과 최경창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요 이 아들도 양반 해주최씨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광복후인 1969년에는 해주최씨 문중이 함경도 기생인 홍랑의 묘 앞에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