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로는 최치원을 들수가 있고요 신라시대 최고의 서예가는 김생을 들수가 있습니다.
김생의 글씨는 마치 왕희지의 글씨를 연상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생은 고려시대 유신 탄연 최우와 함께 신품4현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는 최치원, 김생과 관련한 기록이 잘 나와 있습니다.
●필원잡기의 최치원과 관련한 기록
필원잡기에는 신라시대의 문장가인 최치원과 관련하여서 많이 기록 하였습니다.
필원잡기의 최치원과 관련한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필원잡기에서는 최치원이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였습니다.
●필원잡기의 김생과 관련한 기록
필원잡기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로 신라시대의 서예가인 김생을 꼽았습니다.
필원잡기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인 김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頫)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김생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711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평생토록 다른 기예를 전공하지 않았다.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붓을 잡고 쉬지 않았는데, 예서(隸書)와 행초(行草)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지금도 가끔 그의 진적이 있어 학자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여긴다.
숭녕 연간에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변경(汴京)에 묵고 있었는데, 당시 한림대조(翰林待詔)였던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소에 와서 글씨와 그림 족자를 구하였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여주자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 왕우군(王右軍), 왕희지가 쓴 글씨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그게 아니라 이는 신라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하였으나,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겠소' 하면서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