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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실/지리

‘인천(仁川)’ 지명

by 산골지기 2016.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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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仁川)은 백제 초기에는 도읍지인 미추홀이었고 고구려 장수왕 때(475)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성현(召城縣)이 되었습니다. 1095년(고려 숙종)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된 뒤 1133년(인종 11)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다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여 강등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는데 이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으나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 현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경원부의 옛 이름인 인주(仁州)에서 ‘인(仁)’자와, 행정구역 개편 원칙에 따른 ‘천(川)’자가 합해져서 ‘인천(仁川)’이라는 지명이 탄생하였습니다. 

 

 

고대의 지명 미추홀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 지역 곳곳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사회, 문화적 유산은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 확장되어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미추홀(彌鄒忽)’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강 중류에서 백제가 세력을 떨치고, 대동강 유역에 고구려가 자리잡자 인천은 점차 그 독자적 세력을 잃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끝내 백제와 고구려의 군, 현으로 편입되었으며 해상으로 중국과 교통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인천은 능허대(凌虛臺)를 항구로 하는 대외교통의 창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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