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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2

기독교와 위정척사 운동 19세기에 들어 서구 기독교의 전래, 이것의 세력 확대에 따른 유교 신자들의 감소로 척사위정파는 크게 긴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선의 지배적 이념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으며, 그것을 방치할 경우 체제의 뼈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기독교가 조선 사회와 성리학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이전의 보호 정책을 개방 정책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개방이 초래할 그 영향에 대해 국가와 척사위정파는 인식을 달리 하고 있었다. 이항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식인들에 의한 실학과 동학의 태동, 기독교의 위협, 주기론의 유행, 지하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양명학의 존재, 그리고 사회에 팽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도참설 사상의 유포 등으로 성리학과 사회.. 2016. 6. 20.
조선왕조의궤 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쳐 (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 2016.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