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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11

당나라와 발해 737년 문왕이 즉위하면서부터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였다. 726년 당은 문왕을 발해 국왕으로 봉했다. 문왕은 49차례나 당에 사신을 파견하며 당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당은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 전략의 하나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여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공격하는가 하면,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공격하자 , 발해는 즉각 등주를 공격하였고, 이에 다시 당은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당의 전략으로 발해와 신라는 상호 간에 군사적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반면 신라에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점, ‘신라도’라는 교통로를 통해 사신을 교환하는 등 외교와 통상적인 교류를 이어가.. 2016. 6. 19.
내물왕 내물왕은 왕의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는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지방까지 왕의 권력이 미칠 수 있도록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고구려를 통해 중국 문물을 수입하는 데 힘써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Naemulwang We used the title of King for the first time, after Kim was to strengthen the system succession to the throne. Also, expand your territory to the Nakdong River and strengthened the administrative organization for the king to have the l.. 2016. 6. 5.
신라의 비석 영일 냉수리비는 지증왕이 즉위하기 전에‘지도로갈문왕’으로 불린 사실과 신라 이전의 나라 이름인‘사라’라는 명칭이보인다. 영일 냉수리비는‘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기록한 공문서의 성격을 보인다. 단양 적성비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 세력을 축출하고 첫발을 내디딘요충지에 세운 이 비는 545~55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적성이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던 사실과 새 영토의 주민 통치와관련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 단양적성비에는 신라의 관직명과 인명을 확인할 수있을 뿐 아니라 당시 율령 제도와 이에 따른 호적의 기재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2016. 5. 27.
적천사와 석빙고 적천사 : 신라문무왕 4년(664)에 원효대사가 토굴로 창건하였으며 신라 흥덕와 3년(828)에 흥덕왕의 셋째아들인 심자왕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명종5년(1175)에는 보조국사가 오백대중이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중건하였으나 임란때 병화로 소실된 후 헌종5년(1664)에 중수하였다. 그 후 숙종 20년(1694)에 태허선사가 중수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소실되었다. 현재의 대웅전과 불상 탱화등은 모두 옥련암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 이 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빙고는 신라초기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청도 석빙고는 족선 숙종39년(1713)에 준공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2016.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