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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2

발해의 조선술 발해의 조선술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따라서 당나라와 일본의 발해 관련 기록이나 항해기록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발해 건국 35년째인 733년, 제2대왕 대무예(무왕)가 당나라를 공격하려고 거대한 함대를 조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해 건국 초기에 이미 조선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술이 발달하지 않고는 군선(軍船)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에는 778년 일본 사신이 발해에 갔다가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발해왕이 염주에서 배 두 척을 만들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 전 염주 근방 연해주 남부 해안에서 발해의 조선소 유적지가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016. 6. 19.
당나라와 발해 737년 문왕이 즉위하면서부터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였다. 726년 당은 문왕을 발해 국왕으로 봉했다. 문왕은 49차례나 당에 사신을 파견하며 당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당은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 전략의 하나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여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공격하는가 하면,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공격하자 , 발해는 즉각 등주를 공격하였고, 이에 다시 당은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당의 전략으로 발해와 신라는 상호 간에 군사적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반면 신라에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점, ‘신라도’라는 교통로를 통해 사신을 교환하는 등 외교와 통상적인 교류를 이어가.. 2016.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