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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유학자인 정몽주

산골지기 2024. 6. 2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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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유학자인 정몽주

고려말의 유학자인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로 불리는데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를 정몽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인물은 안향이지만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격적인 시조를 보인 인물은 정몽주입니다,

정몽주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
뛰어난 문장가
외교활동을 벌인 외교가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정몽주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정치가 이었고요 또 명나라, 일본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인 외교가 이기도 합니다.

정몽주는 새롭게 일어난 명나라에 대하여 사대외교를 할 것을 주장하였고요 일본에 가서 왜구의 노략질을 금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정몽주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에는 정몽주를 모신 서원인 임고서원이 있습

니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출처: 문화재청]

뛰어난 문장가인 정몽주

성리학이자 정치가 외교가 였던 정몽주는 뛰어난 문장가 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문장가인 정몽주의 작품들은 자신의 문집인 포은집에 잘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포은집에 수록된 정몽주의 한시인 용산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끄럽구나 나랏일 한답시고 /

自愧因王事

오가며 관인을 수고롭게 함이 /

往來勤館人

누각에 올라서 행색을 바라보다 /

登樓望行色

북 치며 나와서 빈객을 맞이하네 /

撾鼓出迎賓

그릇을 나열하여 진수성찬 제공하고 /

列俎供珍饌

침상을 높게 하여 겹겹 이불 펼쳐 주네 /

高床設累茵

나그네 되어 괴롭다 누가 말하랴마는 /

誰言爲客苦

가난해도 내 집이 좋은 것만 못하도다 /

不及在家貧

용인에 있는 정몽주의 묘[출처: 문화재청]

 

명에 대한 사대외교를 주장한 정몽주

정몽주는 새롭게 일어난 명나라에 대하여 사대외교를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였습니다.

우왕 원년(1374)정몽주(鄭夢周)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제배되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 처음 명()이 건국되자 정몽주가 조정에 극력 요청하여 맨 먼저 귀부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시해를 당하고 김의(金義)사신을 살해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흉흉해하며 감히 조정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또 대의를 떨치면서 아뢰기를, “최근의 변고는 마땅히 재빨리 자세하게 아뢰어서 상국(上國)이 석연하게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우리가 먼저 의심을 품어서 백성들에게 화를 끼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부고를 알리고 또 김의의 일을 분명하게 해명하도록 하였다. 이때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이 다시 원()을 섬기고자 하여 그 사신을 맞이할 것을 논의하였다. 정몽주와 문신 십수인이 상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대계(大計)를 정해야 합니다. 대계를 정하지 않으면 인심(人心)이 의심할 것이고, 인심이 의심을 하면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바다 밖 한 구석에 있으면서 우리 태조(太祖)께서 당() 말기에 일어나신 때부터 중국을 예로써 섬겨왔는데, 그 섬김에 있어서 천하의 의로운 군주인지를 보았을 뿐입니다. 근래에 원씨(元氏)가 스스로 파천(播遷)하면서 대명(大明)이 용처럼 일어나 사해(四海)를 덮었습니다. 우리 승하하신 선왕께서 천명(天命)임을 환히 아시고 표문을 바쳐 신하를 칭하니, 황제께서 그를 가상히 여기시어 왕의 작위로 봉하였으며, 하사품과 공물이 서로 오간 것이 이제 6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적신(賊臣) 김의가 예를 따라 천자의 사신을 전송하다가 도중에 제멋대로 살해한 후 모반하여 북원으로 들어가서 원씨의 남은 얼손들과 함께 심왕(瀋王)왕으로들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천자의 사신을 살해하고 또 군주를 배반한 것은 악역(惡逆)이 극심한 것이니 참으로 그 죄를 바르게 해야 마땅하므로, 위로는 천자에게 보고하고 아래로는 중국의방백(方伯)에게 알려 토벌을 요청하여 그를 죽인 연후에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정몽주를 모신 용인의 충렬서원[출처: 경기도청]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쳤던 정몽주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정몽주는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쳤는데요 정몽주가 하카다에 가서 왜구의 금지를 요청한 것과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지윤(池奫이인임(李仁任)이 그[정몽주]를 크게 꺼리어 언양(彦陽)으로 유배 보내었다가 2년 쯤 되자 임의로 거주지를 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왜구가 매우 성하여 바닷가 주군(州郡)이 황폐해져서 완전히 비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를 근심하여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 하카타[覇家臺]에 보내어 화친하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그 곳의 주장(主將)이 잡아 가두어 나흥유가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우왕3(1377)에는 권신(權臣)이 지난 번 일에 원한을 품어서 정몽주(鄭夢周)를 보빙사(報聘使)로 천거하여 하카타로 가서 왜구를 금지시켜줄 것을 청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전혀 어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카타에이르러서 고금의 교린(交隣) 이해관계를 자세히 이야기하자 주장이 놀라고 탄복하여 객사[]에서 대접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왜승(倭僧)들 가운데 시()를 구하려는 자에게는 붓을 들어 바로 지어주니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고, 날마다 가마를 메고 와서 기이한 승경(勝景)을 보기를 청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가 보낸 주맹인(週孟仁)과 함께 왔으며, 또 포로가 되었던 윤명(尹明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인을 쇄환(刷還)하였다. 또한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으므로 왜인(倭人)들이 오랫동안 칭송하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뒤에 정몽주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다들 탄식하고 한탄하기를 금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재승(齋僧)하여 명복을 비는 자도 있었다.

정몽주는 왜구가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속전(贖錢)을 주고서라도 돌아오게 하고자 여러 재상들을 극력 설득하여 각자 사재 약간씩 내게 하였다.

또한 글을 써서 윤명 편에 주어 보내니 적의 우두머리가 글의 간절하고 슬픈 말을 보고 포로 100여 인을 돌려보내었다. 이로부터 매번 윤명이 가면 반드시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우왕4(1378)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배되었고, 전공(典工예의(禮儀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쳤다. 우왕6(1380)에 우리 태조李成桂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격퇴하였고, 돌아와서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제배되었다. 이듬해에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고려사에는 정몽주는 왜구가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속전(贖錢)을 주고서라도 돌아오게 하고자 여러 재상들을 극력 설득하여 각자 사재 약간씩 내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명에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

정몽주가 명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정몽주와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우왕10(1384)정몽주(鄭夢周)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배되었다. 본국과 조정 사이에 분쟁이 잦아지자 황제가 노하여 장차 우리에게 병사들을 보내려 하면서 세공(歲貢)을 늘려 정하였다.

이에 5년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고 하면서 사신 홍상재(洪尙載김보생(金寶生이자용(李子庸) 등을 장()을 치고 먼 땅으로 유배 보내었다. 이렇게 되자 하성절사(賀聖節使)를 파견해야 할 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고 피하려고만 하였다. 최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이 거론되었는데,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를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다.

임견미가 즉시 정몽주를 천거하자 우왕이 불러 대면하고서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근래 우리나라가 조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는 것은 모두 대신들의 잘못이다. 경은 고금의 일을 널리 꿰뚫고 또한 내 뜻을 잘 안다. 지금 진평중이 아파서 갈 수 없으므로 경으로 대신하고자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대답하기를, “군부(君父)의 명이라면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데, 어찌 천자께 조회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남경(南京)까지 거리가 대략 8,000리인데, 발해(渤海)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날을 빼고도 실로 90일의 일정입니다. 지금 성절(聖節)까지 겨우 60일 남았는데 바람을 기다리는 10일을 빼면 남은 날은 겨우 50일이니, 이것이 신이 한탄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언제 길을 떠나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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