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지기 2017. 5. 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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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지금까지 전하는것중에서 가장 오래된 향가 입니다

서동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있는데 무왕의 어릴적 이름이 서동으로 나옵니다


[줄거리]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서라벌)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원문]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


[의미]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무왕와 왕비(후궁으로서 선화공주)가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도중 연못 속에서 솟아오른 미륵삼존상(彌勒三尊像)을 만나 이를 모시기 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백제 어느 지역의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는 점이다. 백제는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를 이룰 수 있었던 인연이 깊은 땅이었는데, 이를 실현시켜준 인물로서 무왕이 추앙되었다.

미륵불국토의 실현은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제민들에게 앞으로의 전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미륵불국토의 실현을 위해서 희생된 자신이 다시 미륵에 의해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하는데, 서동설화는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설화와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擔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혼재되어 생긴 설화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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