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 전투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다음 해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채광묵은 1895년 홍주의병을 함께 일으켰던 안병찬에게 “나라의 힘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 임금의 신민 된 사람으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원수 놈들의 압제를 그냥 두고 본단 말이오.”라고 하고 의병을 계획하였다.
그는 안병찬, 박창로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민종식은 이들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였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민종식은 대장에 추대되자 1906년 3월 15일(음, 2월 21일) 광시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천제를 지내고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의병대는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일명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관군의 저항에 후퇴한 의병대는 진로를 화성으로 바꾸어 청양의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그러나 관군이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이를 탐문하고 밤 10시경 합천 인근에 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3월 17일) 오전 5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은 의병대를 공격하여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고 의병은 해산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의 친척인 민진석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등과 5월 9일(음,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치동(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홍산, 서천, 남포 등지를 점령하고 광천을 거쳐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성 시내에 들어왔다. 홍성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이때 해미 군수가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자를 보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고종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에게 주어 올리게 하였다. 상주문의 내용에는 을사5적과 이토 히로부미를 주륙할 것을 포함시켰으며, 거병한 이유를 들면서 거의한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홍주성을 의병진이 다시 차지하자 신보균·신현두·이식·안항식·김상덕·유호근 등 각지 인사들이 차례로 집결하였다. 합천전투에서 패한 후 집에서 피해 있던 채광묵도 참가하였다. 민종
식은 의진을 재편성하였는데, 채광묵은 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와 함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채광묵은 병중이었는데, 아들 규대(奎大 1889~1906)는 부친의 출진을 만류하였으나,
“국난을 당하여 순사(殉死)함은 곧 내가 평소에 가졌던 뜻이거늘 어찌 집안에서만 있을까보냐”
하고 아들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은 공주 병력을 지원받아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의병부대는 이를 격퇴시켰다. 21일은 수원헌병부대에서 증파된 헌병과 경찰의 공격을 물리쳤다.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하이바라(排原) 경시와 조선 경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되었다. 이들은 24일 공주경무진위대에서 파견한 57명의 조선병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27일 토보(土坊) 경부를 비롯한 일본 경찰을 체포하였으며, 이때 체포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은 5월 29일 밤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31일 오전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 사살케 하였다. 의병은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때 양민 역시 다수 희생되었다.
蔡李哀哉
전설을 據한 즉 年前 京約所에서 열심하던 蔡光黙씨의 부자가 금차 홍주성에서 中丸被沒하고 客冬에 상소하다가 警廳에 피수하였던 李偰씨도 自家에서 십여 일 却食하고 飮酒致命하였다더라.
서울에서 상소 올리는데 열심이었던 채광묵 부자가 홍주성에서 탄환에 맞아 절명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상소를 올리고 서울 경무청에서 옥고를 치른 이설 李偰 역시 집에서 단식 자결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채광묵의 부인이 후일 시신이라도 찾고자 하였으나 부자의 유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다음 해에 남아 있는 의복을 수습하여 청양의 신왕리 압수동(鴨水洞) 산록에 장사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주성전투에서 그와 함께 전사한 아들 채규대에게는 1992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