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남사당놀이의 연원이나 형성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해동역사》에 따르면 유랑 민중놀이패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한 민중놀이 집단이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집단에서 출발하였으나,
조선말기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생겨나 남사당패라고 하였다.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조직은 엄격하였고 모자란 인원은 가난한 농가의 아이나 고아ㆍ가출아 등으로 충당하였다.
현재까지 이들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남 당진·회덕, 전남 강진·구례, 경남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는 삐리들의 기예(技藝)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독립적인 존속이 어려워지게 되자 중매구와 걸립패와의 교습을 거치게 되고,
사당패·솟대장이패와의 교류도 갖게 되면서 오늘의 형태로 변모된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