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들 가운데 한양의 도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한양의 상공업 발전과 직간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수단의 발전을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된다.
북학파는 청나라의 전성기 모습에만 감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상업 도시로 변모한 18세기 후반의 서울과 탕평책으로 대표되는 영조와 정조의 인재 등용도 그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줬다.
그들은 17세기 초 침류대학사(초기 실학자를 일컬음)들이 추구한 절충적 학풍과 17세기 후반 서울 남인들(야당)이 제기한 고학(古學) 및 농촌경제에 대한 관심도 적극 수용하였다.
이제 한양의 일부 노론은 상공업발전의 모토 위에서 농촌문제 해결도 아울러 고려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부국강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높이자는‘북학’으로 선회한 것이다. 북학의 철학적 기초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있었다. 사람과 만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이 주장은 만물에 대한 관심을 높여 적극적으로 이용후생을 달성하도록 했다.
북학이 체계화된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라는 저술이었지만 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이 남긴 방대한 저작들은 서로 그 뜻이 동조화돼 새 경향을 이루고 있었다. 북학파의 공통점은 청나라 사신단에 섞여 북경에 다녀온 인물들로 그들의 중국 기행문이 발단이 된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청문화의 우수성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우리 내부의 인식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문제인식 속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의 모순에 대한 것도 깔려있어 그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 역시 엿보이며, 농업이나 상공업 등 육체적 노동에 대한 천시라는 전통적 사농공상의 틀을 벗어나 생산이란 행위 자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북학파들은 과거 경세치용학파들과 이용후생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경세치용학파들이 송대의 문화 경제적 융성을 이상향으로 삼는 복고적이었던 것과 달리, 당시 청나라의 상업과 수공업 발전상을 도입하고자 하는 전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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