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은 실학, 철학, 통치학부터 과학, 실용학까지 '높은 수준'으로 '다양한 것들'에 몰두했던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
조선 전기의 퇴계 이황, 율곡 이이에 이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이 때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즉, 삼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다.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다.
훗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위원에까지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그의 두 형과 함께 장기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현(현재 포항시 장기면)이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따라서 신위를 불태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는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사이가 된다.
처음에는 정치제도를 새롭게 수립하는 방례초본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처지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 제도개혁은 포기하고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이다. 실학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 전체를 아우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