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은 본래 고려 말부터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 사대부 가운데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 시기에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주로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을 등용한 것을 계기로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훈구파의 탄압을 받다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를 정치의 전면에서 몰아내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단초가 되었다. 뚜렷한 학통은 없으나 처음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제자들의 등용을 도운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가 길재의 제자였으므로, 길재의 학통이 김종직에게 이어진 것으로 보아 사림을 길재의 학통으로 보기도 한다.
사림은 대부분이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 중소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훈구세력과는 달리 생업에 힘쓰면서 학문을 해야 했기 때문에, 훈구 세력에 비해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농사직설과 같은 농서가 간행되고, 목화와 약초 등의 재배가 널리 퍼지면서, 농산물을 사고 파는 장시가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저수지와 같은 농업 기반시설 확충으로 남부의 일부 지역에만 보급 되었던 새로운 중국의 논농사 기술인 모내기법이 전국으로 퍼지고, 이모작 역시 널리 퍼지면서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사림은 이를 통해 농촌의 중소 지주인 사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고, 농민과 공존하는 안정된 농촌사회를 건설 하고자 하였다. 이때 훈구 세력은 권력을 이용하여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크게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