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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

한니발

by 산골지기 2017.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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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제국, 마케돈 및 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이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최악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한니발의 도피생활은 비티니아에서 끝났고, 한니발은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어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자살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로스와 함께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로 사료된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세째 가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댁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


 이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2]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3] 이 “전략의 아버지”라는 찬사로 한니발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전략가로 여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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