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 661년)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김(金),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이찬(伊飡)에 이르기도 했던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善德) · 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진덕여왕 때는 이찬(伊飡)에 이르게 되고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써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그렇게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된 김춘추는 아들 문왕(文王),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伊湌)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에 대해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보희가 어느 날 서악(西岳)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서라벌 전역이 소변에 모두 잠겨버렸다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이야기를 들은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그 일이 있고 열흘 뒤인 정월 오기일에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김유신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끊은 뒤 자신의 집에서 옷을 수선할 것을 권하며 집안으로 들이고, 자신의 누이동생을 불러 옷을 꿰매게 했다. 보희는 "사소한 일로 귀한 분을 대할 수는 없다"며 사양했고, 문희가 대신 나서서 옷을 꿰매 주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져서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좀처럼 김춘추가 문희와 정식으로 혼인하려 하지 않자 김유신은 "남편도 없는 것이 부모도 모르게 임신을 하였다"며 곧 문희를 자신이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소문을 냈고,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남산(南山)에 오르는 날을 기다려서 뜰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산 위에서 그 연기를 발견한 여왕이 "저것은 무슨 연기인가?" 하고 묻자 옆에서 "아마도 유신이 제 누이를 불태우려는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까닭을 묻는 여왕에게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왕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고 묻는 옆에서, 마침 여왕을 따라 나왔다가 안색이 질린 김춘추를 발견한 여왕은 "너의 짓이구나. 당장 가서 구하라." 하였다. 이후 김춘추는 문희와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4][5]
김유신의 주도와 김춘추의 동조로 이루어진 정략적인 측면이 강했던 이 혼인을 통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진지왕계와 옛 금관가야계 귀족간에 정치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지왕계(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을, 금관가야계(김서현 · 김유신)는 진지왕계의 정치적 위치를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러한 상호 이익에 입각해 이루어진 정치적 결탁은 신라의 중고(中古) 왕실의 진골 귀족 내에서 하나의 신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성골(聖骨)계로 대표되는 기존의 구 귀족집단의 견제와 반발을 받았다.
무열왕은 부계가 진지왕의 자손이고 모계가 진평왕의 자손으로 양쪽 모두가 왕족인 성골에 속했지만, 무열왕 이후 부계만이 왕족인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를 상징적인 진골 최초의 임금으로 평가한다.
선덕여왕 11년(642년) 8월, 백제(百濟)의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의 성주였던 이찬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古陀炤)의 남편으로 김춘추의 사위였는데, 앞서 그에게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백제군과 내통한 부하 검일(黔日)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김품석은 처자를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김춘추는 이찬의 관등에 올라 있었고,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대야성의 일을 계기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는 것이다.
원병을 청하러 고구려에 사신으로 갈 것을 왕에게 건의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국왕 보장왕(寶藏王)과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나 원병을 청했지만, 원병 파병 조건으로 과거 진흥왕(眞興王) 때에 신라가 획득한 죽령(竹嶺) 이북 땅의 반환을 내세운 고구려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김유신의 무력 시위, 그리고 고구려 대신 선도해의 도움으로 "돌아가는 대로 왕에게 아뢰어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孝德天皇) 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듬해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되었다. 춘추와 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하여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648년 12월에 김춘추는 드디어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직접 당(唐)에 입조하였고(《자치통감》)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당에 온 김춘추는 국학(國學)을 방문하여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에 태종의 호출로 사적으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춘추는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사온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요,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태종에게 원병 파병을 호소해, 태종의 허락을 받아냈다.[6]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온탕비(溫湯碑)』 · 『진사비(晉祠碑)』의 글과 《진서(晉書)》 한 질을 김춘추에게 하사하였으며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다(《삼국사기》, 『낭혜화상비』). 앞의 서적들은 태종 자신이 직접 짓고 글씨도 쓴 것으로, 특히 《진서》는 당의 비서감(秘書監)에서 맨 먼저 필사한 두 질 가운데 하나로서 태자(훗날의 당 고종)와 김춘추에게 각각 내린 것이었다. 김춘추도 당으로부터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의 벼슬을 받은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서 당에 남겨두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김춘추는 서해상에서 고구려 순라병에게 포착되어 나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함께 왔던 온군해(溫君解)가 귀인의 관을 쓰고 배에 남아 고구려군의 주의를 끄는 사이 작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춘추가 귀국한 태화 3년(649년)부터 신라는 관복을 당풍으로 바꾸고, 진덕여왕이 직접 당의 왕업을 찬미하는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수를 놓아 보냈으며, 태화 4년(650년)부터 신라의 고유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영휘(永徽) 연호를 쓰는 등 친당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진덕여왕 5년(651년)에는 중국의 제도를 본뜬 정월 초하루일 백관(百官)들이 모여 행하는 하정례(賀正禮)를 처음으로 조원전(朝元殿)에서 치렀으며, 품주(稟主)가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어 왕정의 기밀 사무를 맡았다. 좌이방부(左理方府)가 설치되고,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이 다시 당에 파견되어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 벼슬을 받고 숙위를 맡았다.
진덕여왕 8년(654년) 3월에 진덕여왕이 승하하고, 진골 세력은 상대등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은 이를 사양하고 춘추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춘추는 사양하다가 마침내 국인의 천거를 받아들여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명의 임금을 성골, 무열왕부터 마지막 경순왕(敬順王)까지를 진골이라고 하였으며, 무열왕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8명의 임금이 재위한 시기를 중대(中代)로 분류하였다. 한편 《삼국유사》는 진덕여왕 이후 무열왕부터의 왕계를 하고(下古)로 분류하고 있다.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5월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 무열왕 2년(655년)에는 문희 소생의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문희 소생의 왕자들에게도 관등을 수여하였다. 대각찬(大角湌) 김유신에게는 딸 지소공주를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
당에도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여, 무열왕 즉위년에 고종(高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신라왕의 책봉을 받았으며, 무열왕 2년(655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탈취하였음을 전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은 3월,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무열왕 3년(656년)에는 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가을 7월에는 김문왕을 다시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문왕은 무열왕 5년(658년) 정월에 부왕으로부터 집사부의 중시(中侍)로 임명되고, 김인문도 무열왕 6년(659년) 여름 4월에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서 당에 파견되는 등,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즉위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의 상대등은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 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무열왕 이후 상대등을 왕이 임명함으로써 화백 회의는 혜공왕 이전까지 왕권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무열왕은 고구려 및 백제와 본격적인 전쟁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