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하천은 인간의 주거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물은 식수(食水), 농업용수(農業用水), 교통로(交通路)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집단주거지역은 하천유역에 형성되었으며 그래서 인류문명의 발상지들도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삼국이 길항하던 시기에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고 신라의 삼국통일 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동안에는 한강유역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조선의 도읍이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서울이 14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조선(朝鮮)의 도읍 한양(漢陽)이었듯이 2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읍이었습니다.
서울의 문화유산이 조선시대의 것은 많이 전해지고 있으나 한성백제의 것은 접하기가 어려웠습니다만 최근에 한성백제의 도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다행히 한성백제의 역사적 향기를 일부분이라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전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시기구분 작업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도의 이동에 따라 백제시대 구분
▶기원전 18년에 건국한 이후 475년에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한강유역에 머물렀던 493년간의 한성시대
▶고구려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죽고 황급히 남하하여 금강유역의 공산성(公山城)에 머물렀던 63년간의 웅진시대
▶백제의 전성기이자 패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백마강유역(白馬江流域)에 정착한 122년간의 사비시대
♣ ♣ 한강유역을 두고 삼국이
다투기 전에 백제가 제일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와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하한 온조(溫祖)와 비류(沸流)는 송파구 일대인 한강유역과 인천 문학경기장 근처인 미추홀(彌鄒忽)에 각각 머물렀는데 온조를 도운 10명의 신하를 내세워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다가 미추홀의 비류가 죽고 그의 백성들이 즐겁게 온조에게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습니다.